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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의 제왕 임창정의 인간미

나는 늘 뻔한 길을 벗어난 로맨틱 코미디에 끌린다. 단순히 꽃과 촛불 저녁식사가 아닌, 결함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관계를 맺게 되는 이야기가 좋다. 바로 그런 점이 신근호 감독의 불량남녀에 끌렸다. 임창정과 엄지원이 주연을 맡은 이 2010년 작품은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블록버스터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끌리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소박한 목표, 기묘한 유머 톤, 다층적인 캐릭터들 덕분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흥행 성적으로 보자면 불량남녀는 한국을 뒤흔든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기획하고 시기를 잘 맞췄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던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임창정 하면 대부분의 배꼽 빠지는 코미디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단순한 웃음만이 아니다. 겉보기에 가벼운 캐릭터 속에서도 뜻밖의 감정 깊이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불량남녀에서 그는 빚 독촉 일로 재판을 받고 사회봉사 명령을 받아 유치원에서 일하게 된 동철역을 맡았다. 설정만 보면 어이없지만, 임창정의 연기는 그 상황을 진지하게 만든다.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 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사람들은 웃기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이 느껴지기 때문에 보러 갔다. 불량남녀에서도 그 따뜻함이 잘 드러난다. 만약 제작진이 그의 감성적인 면을 더 부각하는 방식으로 홍보를 했다면, 나는 이 내용을 보며 입소문만 잘 났어도라는 생각을 했다. 코믹하면서도 인간미가 넘치는 임창정의 이중적인 매력을 더 적극적으로 내세웠다면 분명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황당하지만 기묘하게 통하는 이야기 구조

하지만 때로는 가장 기묘한 설정에서 진짜 이야기가 탄생하기도 한다. 불량남녀는 초반에 웃기려는 장면이 많지만, 중반부터 독종녀(엄지원)와 직업은 형사인 독종녀에게는 악질 고객님(임창정)의 신용불량 형사와 성격불량 상담원의 만남 이야기이다.  임창정이 점차 변화해 가는 모습으로 독종녀가 미묘한 감정선은 예상외로 따뜻하다. 만약 이 작품을 더 넓게 개봉했거나,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예고편을 공개했다면 더 많은 공감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설정은 다소 황당할지 몰라도 감정적인 보상은 확실하다. 늘 정형화된 로맨스가 반복되는 시장에서 불량남녀는 신선했다. 그 점을 마케팅 전략에서 제대로 살렸다면 충분히 틈새시장을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절제된 연기로 중심을 잡은 엄지원

이 작품에서 가장 저평가된 연기는 엄지원이 보여준 것이다. 보통은 진지한 드라마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녀가 불량남녀에서는 냉소적이지만 내면에 상처가 있는 카드사 채권담당자 독종녀를 연기했다.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분위기를 무겁게 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가볍게 흐르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준다. 임창정과의 케미도 흥미롭다. 뜨겁기보다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감정. 말보다 눈빛이 많은 로맨스다. 캐릭터는 인생에 지친 사람이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 미묘한 감정선을 엄지원은 과장 없이 표현했다. 그 점에서 나는 그녀의 연기가 전체 톤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고 본다. 흥행력으로 보자면 엄지원은 티켓 파워가 큰 배우는 아니었지만, 불량남녀에서의 존재감은 신뢰감을 줬다. 만약 홍보에서 그녀의 이전 연기 이력을 강조하고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며 이번 작품을 소개했다면, 좀 더 진지하게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코미디를 ‘가볍기만 한 영화’로 만들지 않았다. 그녀 덕분에 더 인간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불량남녀는 대중적으로 크게 흥행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흥행 요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임창정의 감성적인 면을 강조한 마케팅, 기묘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 구조, 그리고 엄지원의 안정적인 연기가 적절히 홍보되었다면 입소문을 타고 숨은 명작이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화려한 액션이나 공식처럼 찍어낸 로맨틱 코미디가 가득한 한국에서, 불량남녀는 기꺼이 이상한 영화가 되기를 택했다. 어색하고 따뜻하며 어딘가 정이 가는 그런 영화. 내게는 그런 영화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영화가 불량남녀였다. 조금은 엉뚱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만났더라면, 지금쯤 모두가 웃으며 회상하는 그 해 그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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